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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표현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업의 목표는 원칙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에만 기초하여 양자 역학 이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이야기는 하이젠베르크가 북해의 작은 섬 헬골란트에서 전자의 불연속성을 내포하는 보어의 원자 모형에 관한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행렬역학을 발견하게 되며 시작된다. 저자의 말처럼 겨우 스물세 살에 인류가 엿본 자연의 가장 아찔한 비밀 중 하나를 처음 발견한 후, 척박한 바람이 부는 헬골란트 섬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올라 거친 파도를 바라보며 일출을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행력역학은 전자의 위치를 고전역학에서는 단일한 실수 값으로 나타내는 대신, 출발 궤도가 행이고 도착궤도가 열인 행렬로 표현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의 핵심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 전자가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물체라는 생각을 버리고 전자의 움직이는 기술하는 대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 즉 측정가능한 물리량 사이의 관계식을 세워 모든 것을 오직 관찰 가능한 양에 근거해서만 설명하자는 새로운 발상을 떠올린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굉장히 기묘한 사실들이 따라 나온다. 오직 관찰 가능한 양에 대해서만 계산을 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전자를 관찰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전자가 어디에 있고, 그 상태가 어떠한지 기술할 수 없다. 또한 행렬곱의 비가환성 때문에 연산순서에 따라 다른 물리량이 나온다.

\[XP - PX = i\hbar\]

위 식에서 $X$는 입자의 위치, $P$는 운동량, $\hbar$는 플랑크상수를 $2\pi$로 나눈 값이다. 즉, 입자의 위치 $X$를 먼저 측정하고 운동량 $P$를 측정할 때와 먼저 운동량 $P$를 측정하고 위치 $X$를 측정하면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확정될 수 없다. 이는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의 최대치에 도달하더라도, 이전 정보를 잃어버리면서 다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래는 과거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세계는 확률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첩상태를 설명하는 쉬운 예제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 한 마리와 청산가리가 든 유리병, 방사성물질 라듐, 방사능을 검출하는 가이거 계수기, 망치가 상자에 들어 있다. 상자는 외부 세계에 차단돼 있고,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다. 라듐 핵이 붕괴하면 가이거계수기가 그걸 탐지한다. 그러면 망치가 유리병을 내려쳐 깨게 돼 청산가리가 유출된다. 청산가리를 마신 고양이는 죽게 된다. 라듐이 붕괴할 확률은 1시간 뒤 50퍼센트다. 1시간 뒤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양자론에 따르면 이때 고양이는 죽거나 죽지 않는 ‘양자적 중첩’ 상태에 있으며, 우리가 실제로 고양이를 관측할 때 까지 그 상태가 지속된다. 상당히 우리의 직관과 벗어나 보이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아직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고, 세계에 대한 이론 가운데 지금까지 단 한번의 오류도 없으며 그 한계를 알지 못하는 유일한 근본 이론이다.

 

아무도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것인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인류 지성사의 거인인 아인슈타인조차도 양자역학에 의문을 제기하며 남긴 말이다. 이와 같은 발상은 우리의 상식에 위배되지만, 세계의 실재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따라서 양자역학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에 관한 철학적인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저자는 관계론적 해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즉 속성은 상대적인 것이고 상호작용이 없으면 속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예로 들면,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면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 중에 하나인 상태에 존재하고, 상자 밖에 있는 나에게는 고양이가 죽었거나 살아있다. 또한 이러한 상호작용을 대상의 속성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더 나아가 대상의 속성은 그 대상이 다른 대상에 작용하는 방식 바로 그 자체이므로 상호작용 없이 속성을 갖는다는 생각은 무의미하다.

 

주춧돌도 없이 지어진 환영처럼 구름 걸린 탑도, 화려한 궁전도 장엄한 사원도 거대한 지구 그자체도 그래, 그 안의 모든 것도 녹아내려 이 실체 없는 광경이 사라지듯, 구름 한 조각 남지 않을 것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The Tempest)』 4막 1장 中

관계론적 해석에 따르면 실재는 상호작용의 그물망을 짜는 사건들로 묘사될 수 있다. ‘개체’는 이 그물망의 일시적인 매듭에 불과하고, 개체의 속성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결정된다. 기존 서양 철학에서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먼저 세계가 인간의 정신 속에만 있다고 보는 관념론과 세계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물질 입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유물론으로 나뉜다. 저자는 이 두 관점을 모두 비판한다. 먼저 관념론은 흔히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의 배후에 실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즉 고정된 실제 공간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사물이 움직인다고 가정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대상의 속성은 상호작용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 입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상호작용 속에 일시적인 매듭에 불과하며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독립적인 속성을 지닌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착각해왔던 것이다. 이에 저자는 인도 철학의 초석 중 하나인 나가르주나의 ‘공 空’사상를 통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다.

 

만약 모든 존재를 자성(自性)을 가진 실체로 본다면 그대는 그 존재가 인연이 없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존재도 인연(因緣)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가르주나(龍樹), 『중론(中論)』

나가르나의 핵심 논지는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서,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서로 연결된 현상들의 집합일 뿐, 각각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이를 이루는 구조조차도 의미없으며 텅 비어있다고 말한다. 나가르주나의 ‘사구 부정’의 예시를 들자면, 구조는 다른 것을 조직하기 위해 설계된 한해서만 존재한다. 구조는 대상에 앞선 것도 아니고, 대상에 앞서지 않은 것도 아니며, 둘 다도 아니고, 둘 다 아닌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공조차도 본질이 비어있는 것이며, 그것마저도 관습적인 것이다. 즉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자립적인 대상이 없이도 상호 관계성을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상호 의존성을 생각하려면 자립적 본질은 잊어야 한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면 우리는 ‘비가 내린다’고 가정한다. 여기서 비에 자립적인 속성이 있다고 가정하면 비는 ‘내린다’는 속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중복의 오류에 빠지고, 후자의 경우는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양자론을 통해 나온 결과들은 전자의 운동량과 위치는 동시에 결정 될 수 없고, 우리가 관측을 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등 우리의 직관을 매우 벗어난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이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우리가 사물의 총체를 상상할 때 사물 바깥에 외부 관찰자를 상정하는 오류를 범하므로 나오는 잘못된 직관이다. 세계에 대한 모든 묘사는 내부로부터만 이루어지고, 사물의 총체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서로를 비추는 부분적이고 내부적인 관점들만이 존재하고 세계는 이러한 관점들의 상호 반영인 것이다. 모든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따라서 나’라는 독립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생겨나는 잘못된 직관이 우리가 세계를 더 잘 기술하게 해주는 양자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양자 역학, 양자 중첩등 이해하기 힘든 개념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한 저자의 관점이 인상깊었고, 이에 대한 기반을 마련한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어떠한 근본적인 실체를 가정하지 않고도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독립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기에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은 무상하며 절대적인 것은 없기에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지만, 변화에 대한 어떤 기대를 하고 그 기대에 집착을 하기에 변화에 허무를 느끼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공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대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변화에 대한 허무감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